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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칠년 칠팔구 투쟁을 동지여 기억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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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춘애[인천사무부장]
댓글 0건 조회 9,471회 작성일 07-10-18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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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칠년 칠팔구 투쟁을 동지여 기억하는가”
87년 789 노동자 대투쟁의 의미


박준성 cast@ca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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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파업가>를 기억하시는지요. 이 노래를 불러보았거나 들어보셨어요?.

팔칠년 칠팔구 투쟁을 동지여 기억하는가
거제에서 구로까지 족쇄 깨고 외쳤던 날을
우리는 뼈저린 각성에 드디어 깨달았노라
천만형제 단결 없인 노동해방없다는 것을
나가자 형제여 방방곡곡 대동단결로
말하라 형제여 총파업투쟁으로 말하라
노조 깃발 피에 젖어 삼천리에 날릴 때까지
싸우리라 하나되리라 기필코 승리하리라
태우리라 꽃피우리라 죽어간 동지의 피를
아~ 해방 그날까지 총 파업 투쟁으로

“팔칠년 칠팔구 투쟁을 동지여 기억하는가” 기억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기억은 머리 안에 저장되어 있는 과거의 것입니다. 모든 기억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과거의 기억은 현실에서 체험하여 얻은 느낌과 결합될 때 다시 살아나서 미래를 만들어가는 힘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떤 때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될까요? 개인이나 조직이나 지금 일이 술술 잘 풀려나갈 때는 과거를 돌이켜 볼 일이 없습니다. 지금 문제가 꼬여 있거나, 고민에 휩싸여 있을 때, 운동에 위기감이 높아질 때 과거를 돌이켜 보면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팔칠년 칠팔구 투쟁을 기억하는가"

과거를 돌아보면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하고 후회를 하고 뉘우치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과거는 다시 돌이킬 수도 없고, 없앨 수도, 바꿀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과거는 흘러간 것이 아니라 현재로 흘러 들어와 지금의 결과 속에 담겨 있는 것이지요. 지금 현재도 일 년이 지나고 십년이 지나면 그때가 됩니다. 그래서 오늘이 그때가 되었을 때 다시 되풀이해서 후회하지 않으려고 그때라는 거울에 지금을 비추어보는 것입니다.

올해는 1987년 6월 항쟁 20주년이면서 7,8,9월 노동자 대투쟁 20주년입니다. 벌써 20년의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지금 나이에서 20살을 빼면 1987년에 몇 살이었는지 계산이 나오지요. 제가 90년대 중반, 5.18 민중항쟁 기간 때 1980년 광주민중항쟁을 가지고 강의를 하다가 5.18 광주 관련된 노래를 같이 불러 보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학생들이 노래를 전혀 모르는 거예요. 헤아려 보니까 20살 정도 나이의 학생들은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났을 때 5살 밖에 안 되었던 겁니다. 학생들에게는 이미 따로 배우지 않았으면 부를 수 없는 노래가 되었던 것이지요.

1987년 6월 항쟁이나 7.8.9 노동자 대투쟁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어느덧 20년 세월이 훌쩍 지나 1987년 20대였던 사람들은 40대, 30대였던 사람들은 50대가 되었습니다. 지금 20대 중반인 사람들은 그때 5.6살 나이었겠지요.

1987년 7,8.9월 노동자 투쟁에 참여한 경험을 가지고 아직까지도 현장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선배 노동자들도 있지만 40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뒤로 물러나 후배들이 하는 일을 지켜보고 있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 나이 쯤 되면 집안에서 한참 돈 들어 갈 일이 많을 때이기도 하지요. 뒷짐 지고 자기 일에 매몰되다보면 싸웠던 경험은 기억으로만 남아 있게 됩니다. 열심히 앞장서서 활동을 하고 있어야 자신의 무용담을 후배들에게 신나게 전해 줄 텐데 그렇지 못한 것이지요.

점점 잊혀져 가는 87년 노동자 대투쟁

강의를 다니면서, 1987년 7.8.9 노동자 대투쟁을 직간접으로 겪어보지는 못했어도 가까운 역사니까 잘 알고 있겠거니 하고 간략하게 설명하고 넘어가려다 표정을 보면 그런 것 같지도 않아요. 많은 노동자들에게 20년 전의 역사는 스스로 경험하여 머리 속에 간직하고 있다가 자극이 오면 바로 떠오르는 ‘어제 일’이 아니라 공부해야할 역사가 된 것 같습니다.

마석 모란 공원에는 1980년 5월 4일 서광노동조합 구로지부 쟁의부장으로 활동하다가 어용노조와 회사 측의 탄압에 맞서 분신한 김종수 열사의 묘와 묘비가 있습니다. 묘비명에는 그가 살아 있을 때 했던 말이 담겨 있습니다.

"세상 살아가는 동안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이다 진실을 알면서도 회피하는 것 노동자들의 투쟁이 정당하고 인간다운 삶을 위한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함께하지 못하는 것은 동지에 대한 배신이다 참세상 그날까지 참되게 살아가자"

한 사회 구성원들의 생존을 위해 가장 필요한 일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만들어 내는 일입니다. 노동을 통한 생산이지요. 좀 더 나은 생활을 위해서는 없어야 할 것을 없게 만드는 투쟁이 필요합니다. 역사를 움직이는 두 수레바퀴가 노동과 투쟁이며, 역사를 노동의 역사, 투쟁의 역사라고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노동자 운동의 역사를 보면,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위한은 노동자들의 생존권 생활권 투쟁은 사회발전의 동력이었으며, 사회구성원 대다수에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진실을 누구나 다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1999년 동아일보에서 밀레니엄 21세기를 맞는 특집으로 1900년부터 1999년까지 세계사와 우리 근현대사의 중요한 사건을 담은 20세기 연표를 실은 적이 있습니다. 100년간의 역사 가운데 노동운동과 관련된 사건이 몇 개나 들어 있을 것 같습니까?

동아일보 밀레니엄 특집에 87년 노동자 대투쟁 빠져

1970년 전태일열사 분신과 1979년 와이에이치 노동자 신민당사 농성 단 두 사건만 실렸습니다. 그런데 1987년 6월 항쟁이 일어나고 잇따라 노동자 100만 명 이상이 참여했던 7,8,9월 노동자 대투쟁은 실려 있지 않습니다. 7.8.9 노동자 투쟁은 이후 ‘87년 체제’를 만든 중요한 사건이었는데도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것은 ‘오대양 집단변사 사건’이었습니다. 이처럼 과거의 역사는 누군가에 의해서 선택되거나 배제됩니다. 동아일보의 연표는 노동자의 투쟁이 정당하고 인간다운 삶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작은 본보기의 하나일 뿐입니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직선제 개헌을 골자로 하는 6.29 선언이 발표되었습니다. 16년 만에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보수 정치세력은 물러섰고, 6월 항쟁에 참여했던 많은 민주화 운동 세력도 주춤하며 머뭇거리다가 점점 선거를 통하여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선거혁명’의 환상에 빠져들어 갔습니다.

민주주의 실천 투쟁의 주체는 노동자임을 보여줘

그러나 6.29 선언에는 노동자의 생존권, 정치 권리, 작업 현장의 민주주의 같은 문제는 전혀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보수 정치인들이나 중간층, ‘민주화 운동 세력’이 6.29 선언으로 투쟁을 멈추거나 뒤로 물러섰지만 노동자들은 최소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생존권과 생활권을 확보하려고 투쟁의 불꽃을 이어나갔습니다. 그것이 7.8.9월 노동자 대투쟁이었습니다. 7.8.9 노동자 투쟁은 정치적 ‘민주화 운동’을 넘어 작업장에 이르기까지 실질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투쟁의 주체가 노동자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1987년으로부터 17년 전 서울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22살 청년 노동자 전태일이 “근로자도 인간이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일요일은 쉬게하라”고 외치며 분신하였습니다. 17년이 지났어도 노동자들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랜 시간 힘들게 일하고도 임금은 먹고 살기 힘들 정도로 낮았습니다. 산업재해도 세계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전두환 정권의 억압적 노동통제와 군대 같은 규율로 작업 현장은 숨이 막힐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비인간적인 취급을 받으면서도 먹고 살려고 일해야 했습니다.

노동자들의 요구와 이해를 위해 싸우려면 노동조합이 필요합니다. 1970년대 1980년대 치열한 민주노조운동이 전개되었지만 대부분 일터에는 민주적인 노동조합이 없거나 있어도 회사 측 앞잡이 노릇을 하는 어용노조가 많았습니다.

20여 년 전 일입니다. 울산에서는 큰 공장인데도 남성 노동자들에게는 머리가 귀를 덮으면 정문에서 ‘바리깡’으로 짧게 머리를 깎고, 군인들처럼 스포츠머리를 하고 다니도록 하기도 하였습니다. 출근할 때 푸른 작업복을 입지 않으면 회사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대부분 노동자들은 군대와 같은 규율 속에 군인들 같은 통제를 받으며 일해야 했습니다.

군대식 규율과 통제, 가부장적 질서

군대식 규율과 통제와 함께 작업현장에서 노동자들은 가부장적인 권위에 복종하도록 강요받았습니다. 그런 분위기를 보여주는 자료를 하나 볼까요. 1987년 8월 18일 6만여 명의 울산 노동자들이 남목고개를 넘으면서 7.8.9 노동자 투쟁이 정점으로 치닫던 날 ‘챔프그룹’의 광고 선전이 신문에 실렸습니다. 거기에 이런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고용주는 가정으로 치면 부모가 아닙니까, 근로자는 가정으로 치면 자식이 아닙니까. 자식된 도리로 부모에게 대들면 부모 마음은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

이 광고가 실린 때가 7.8.9 투쟁이 정점으로 치닫던 때라고 하였지요. 결국 자식 같은 근로자들이 부모 같은 고용주에게 대드는 ‘패륜아’ ‘후레자식’같은 짓거리를 하고 있다는 욕이 담겨 있는 광고입니다.

그리고 내용과 함께 실려 있는 그림은 사장은 나이 들고, 노동자는 젊게 그렸습니다. 늙은 노동자도 있고 젊은 사장도 있는데 그림을 이렇게 그림으로써 은연중에 장유유서의 논리를 주입합니다. 나이와 관계없이 사장이나 관리자 앞에 서면 꾸벅 죽어야 할 것 같이 만들려고 합니다. 가부장적인 권위주의로 노동자를 통제하겠다는 발상입니다. 유교의 삼강오륜에 바탕을 둔 윤리 도덕을 자본가와 노동자 관계에 대입하여 상하수직의 관계와 질서를 유지하려는 유치한 의도가 깔려 있는 것이지요.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전까지만 해도 노동자들, 특히 생산 제조직 노동자들은 주로 공돌이, 공순이로 불렸습니다. 한말 외국인이 우리나라를 여행을 하고 쓴 견문록을 보면 그때도 시골의 총각, 처녀들을 돌이, 순이라고 많이 불렀다고 합니다. 1960.70년대 농촌에 사는 돌이와 순이의 사랑을 노래한 것이 ‘갑돌이와 갑순이’입니다. 갑돌이와 갑순이가 결혼을 해서 농촌에 살았다면 농부가 되었을 텐데, 돌이와 순이가 돈 벌러 도회로 나와 공장을 다니게 됩니다. 공장 다니는 돌이와 순이라 해서 ‘공돌이’와 ‘공순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다. 노동자들이 먹고살기가 힘들고, 노동자를 천대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공돌이와 공순이는 비속어로 자리 잡았습니다. 군인들을 ‘군바리’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한 말이지요.

1987년 7월 5일 울산에 있는 현대 엔진에서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면서 7.8.9 노동자대투쟁이 불붙기 시작하였습니다. 울산에서 시작한 노동자 투쟁은 경남 공업지대인 부산, 마산 창원을 거쳐, 거제도에서 구로까지, 강원도 태백 광산에 이르기까지 전국 공단지대로 퍼져나갔습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은 한국전쟁 뒤에 벌어진 노동투쟁 가운데 규모가 가장 컸습니다. 1970년대 민주 노조 운동이 중소영세사업장의 여성 노동자들이 중심이었다면 87년 노동자 대투쟁에는 재벌계열 대기업 노동자들도 앞장서 참가했습니다. 노동자 1천 명 이상이 일하는 대규모 사업장 가운데 75.5%가 쟁의에 참가하였습니다. 대기업에서 중소기업, 중화학공업에서 경공업으로, 광공업에서 운수, 부두, 선원, 사무직, 전문직, 판매서비스직 같은 모든 산업으로 퍼져나갔습니다. 70여 일 동안에 기간에 3500여 건에 가까운 쟁의가 발생하였습니다. 모두 122만에 가까운 노동자들이 투쟁에 참가하였습니다.

울산, 구로, 마창, 거제, 태백, 인천 등 전국으로 70여일 동안 3500여건의 쟁의에 122만 여 노동자 참가, 선투쟁-후협상 방식

노동자들의 투쟁양상은 대부분 ‘노동쟁의 조정법’에 따라 쟁의발생 신고를 하고 냉각기간이 지난 뒤 쟁의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작업장을 점거 하고 파업 농성을 벌 이면서 나중에 협상하는 ‘선투쟁-후협상’이었습니다. 노동자를 위한 법이 아닌 법을 벗어난 ‘탈법투쟁’을 통하여 ‘노조결성의 자유-민주노조 쟁취’, ‘임금인상’ ‘인간적 대우’를 요구하였습니다. 임금인상과 노동조건을 개선하라는 요구와 함께 노동조합을 새롭게 설립하고, 회사쪽 앞잡이 노릇을 하던 어용노동조합을 민주노주로 바꾸었습니다. 1987년 한 해 동안 노동조합이 2,675개에서 4,103개로 늘어났습니다. 노동조합 조직률도 12.3%에서 13.8%로 늘어났습니다.

전두환 정권과 자본가들은 노동조합 설립신고서를 빼앗고, 경찰과 폭력배를 동원하여 노동자들을 폭력으로 해산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거제도 옥포에 있는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가 최루탄을 맞고 22살 한창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7.8.9 노동자 투쟁은 요구사항이 단위 사업장 안의 임금 인상에 집중되었고(70%), 요구를 전 계급적 제도적 요구로 넓혀나가지는 못했습니다. 지역별 산업별 연대투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민중운동과 연대하지 못한 한계도 있었습니다.

87 노동자 대투쟁은 거대한 '인간선언'

하지만,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노동자들의 거대한 ‘인간선언’이고 ‘주인선언’이었습니다. 17년 전 전태일 열사가 혼자 외롭게 '근로자도 인간이다'고 외쳤습니다. 17년 뒤 100만이 넘는 노동자들이 함께 노동자도 인간이라고, 더 이상 노예로 살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겪으면서 노동자들을 천대하고 비하하던 '공돌이' '공순이'라는 말이 우리사회에서 썰물이 빠져나가듯 사라졌습니다. 노동자 대투쟁 이후로는 노동자들이 그렇게 벗고자 했던 작업복을 입고 다녀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될 만큼 사회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공장지대에서는 작업복을 입고 가면 외상술을 주었고, 자랑스럽게 작업복을 입고 선을 보러 나갈 수 있었다는 글도 있습니다.

노동자들은 투쟁하면서 스스로 노동자라는 의식을 높이고, 연대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면서 좀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얻었습니다. 7.8.9 노동자 대투쟁은 민주노조운동에서 또 하나의 커다란 분수령을 만들었습니다.
1987년 7.8.9 노동자 투쟁이후 노동조합활동에서 민주노조운동이 주된 흐름으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연대 조직 건설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87년 12월 마산 창원지역노동조합연합(마창노련)을 시작으로 각 지역노조협의회(지노협)를 만들었으며, 사무전문직 노동자들은 1987년 11월 전국사무금융노동조합연맹을 시작으로 업종노조협의회(업종협)을 건설하여 연대조직을 확대하였습니다.

87 대투쟁으로 마창노련, 지노협, 전노협 등 조직 건설

투쟁을 통한 조직건설이라는 중요한 원칙을 배웠으며, 대중파업, 공장점거투쟁과 가두투쟁, 선투쟁 후교섭이라는 투쟁의 경험을 쌓았습니다. 정치적 민주화를 넘어 작업장 민주화를 요구하고 투쟁함으로서 실질적 민주주의 내용을 넓혀나갔습니다.

파업을 통해 노동자가 공장과 세상의 주인임을 자각한 노동자들은 다음해, 1988년 11월 13일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열린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및 노동악법 개정 전국노동자대회’를 열면서 피로 쓴 ‘노동해방’이라는 깃발을 선보였습니다. 이미 1920년대 선배노동자들이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을 결성하면서 “노농계급을 해방하고 완전한 신사회를 실현할 것을 목적으로 함”을 강령 제1조로 내세운 적이 있습니다. ‘노동자들이 해방되는 새로운 사회 건설’이라는 노동운동의 방향과 목표는 1945년 11월에 결성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의 소멸과 함께 역사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골짜기 바위와 자갈과 흙 밑으로 흐르던 물줄기가 어느 지점부터 솟아나 샘이 되고, 졸졸 흐르던 물이 모여 시내를 이루고 콸콸 세차게 흐르듯 1987년 7.8.9 노동자 대투쟁을 경험하면서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노동해방’ 세상에 대한 염원이 다시 역사의 전면에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노동해방은 현재에도 유효한 의미

역사를 길게 보면 고대사회에서 노예가 해방되는 과정이 역사의 제 길이었고, 중세 사회에서 농노가 해방되는 과정이 역사의 제 길이었듯이,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가 해방되는 과정이 역사의 제 길입니다. 노예해방과 농노해방 투쟁이 정당하고 인간다운 삶을 위한 것이었듯이 노동자 해방을 위한 투쟁도 정당하고 인간다운 삶을 위한 것이며 역사에 발맞추어 가는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해방’은 낡은 레코드판의 흘러간 옛 노래가 아니라 여전히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장엄한 교향곡으로 살아 있어야 합니다.

1987년 7.8.9 투쟁을 겪은 노동자들은 1988년, 1989년 투쟁의 성과를 모아 1990년 1월 22일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1995년 민주노총을 건설하였습니다.

민주노조운동이 위기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위기가 아닌 때가 없었습니다.
운동이 위기에 닥쳤을 때 위기를 디딤돌 삼아 싸웠던 선배노동자들의 투쟁의 역사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억을 장악하는 자가 역사 지배, 새로운 사회 공동체 향한 꿈 버리지 말아야

과거의 기억을 장악하는 자(세력)가 역사를 지배하고, 역사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고 합니다. 노동자가 노동자 운동의 역사를 기억하는 일은 노동자들의 투쟁이 정당하고 인간다운 삶을 위한 것이고, 역사에 발맞추어 나가는 길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배우는 것입니다.

없어야 할 것은 없애고, 있어야 할 것을 있게 만드는 파괴와 창조, 노동과 투쟁을 통하여,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고 착취, 차별하는 세상을 끝장내고, 누구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그 일이 사회에서도 쓸모 있고, 먹고 살 걱정 없이 올바로 잘살 수 있는 세상, 모든 사람이 함께 자유롭고, 평등하고, 평화롭고,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해방 세상, 그러한 새로운 사회 공동체를 향한 꿈과 희망을 버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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