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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조심해, 저 사람들 인정사정 안봐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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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춘애[인천사무부장]
댓글 0건 조회 8,731회 작성일 08-03-19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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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조심해, 저 사람들 인정사정 안봐줘"



[오마이뉴스   2008-03-18 11:05:57] 



[오마이뉴스 성하훈 기자]
펑!펑!펑!


최루탄 소리가 터지는 순간이면 늘 단출한 차림의 흰색 하이바가 맨 앞에 있었다. 거세게 돌진해 오는 그들은 때로는 시위대의 옆구리를 치고 들어오기도 했다. 우왕좌왕하는 사이 달려드는 억센 손은 사람들이 보이는대로 낚아챘다. 팔이 심하게 비틀린채 엉기적 엉기적 끌려가는 사람들.



굴비두름 엮이듯 고개 숙인 채 닭장차로 향하는 사람들에게 발길질세례는 피할 수없는 또다른 고통이었다. '너희들 때문에 우리가 이 고생한다'며 화풀이 하듯 이단 옆차기를 날리는 그들. 손으로 뒤통수를 치는 것도 예사였다. 몽둥이로 쿡쿡 찌르기도 했다. 매서운 눈으로 지나가던 사람들에게 날카로운 눈빛을 던질때면 움찔한 기분마저 들었다. 아니 무조건 멀리 피해있어야 했다. 아무 잘못 없더라도 옆으로 다가온 그들이 팔을 비트는 순간, 길가던 시민도 시위 가담자로 규정될 뿐이었다.



청색 상의에 청바지를 입어 청색으로 도배한 모습이기도 해 '청커버'라고도 했고, 평상복인듯 한 차림에 원형 방패와 흰색 헬멧, 곤봉만으로 경무장을 한 그들을 '사복조'라 부르기도 했다. 간혹 일반적인 경찰을 지칭하는 은어인 '짭새'로 부르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을 '백골단'이라 불렀다.



청커버, 사복조, 짭새, 백골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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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위된 경찰 87년 6월항쟁 당시 신세계백화점 앞에서 시위대에 포위된 전경들과 백골단.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던 이들에게 시위대는 비슷한 방법으로 되 갚음하기도 했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그날은 격동하는 역사의 소용돌이속에 뛰어들어있던 시기였다. 도심에서 시위대의 일부가 되어 숨바꼭질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모였다 흩어졌다를 반복하며 을지로와 충무로, 퇴계로를 전전하던 중이었다. 전면과 후면에서 동시에 들어오는 백골단. 그들을 비웃으며 미꾸라지 빠져 나가듯 옆쪽 골목길로 숨어들었고, 저만큼 돌아서 나름 안전하게 빠져 나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순간 멈칫했다. 저편에서 시위대를 쫓다 수확이 없는 듯 세명의 백골단이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튈 수도 없는 상황, 긴장됐지만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마침 눈앞에 구멍 가게 보였다. 얼른 냉장고를 열고 아이스크림을 집어 들었다. 한글이 쓰여진 티셔츠을 입고 있다는 사실이 순간 걱정됐다. 그럴수록 속으로 떨리는 마음을 다스렸다.



'떨지마! 긴장하지마! 태연해야해!'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멀뚱멀뚱 쳐다보는 순간 태연히 내옆을 지나던 그들. 다행이다 싶어 안심하던 찰나, 그러나 나를 비웃듯 그들은 야수로 돌변해 있었다. 순식간에 나를 둘러싸더니 한손이 억세게 다가와 허리띠를 붙들었다. 1초도 안되는 사이 나머지 손들이 내 양손을 엑스자로 꺾으며 치켜 올렸다. 한 입만 살짝 핥은 내 아이스크림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며 처참히 뭉개졌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이런 날벼락이!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발버둥쳐 봤지만, 신체의 자유는 그들에게 제압당한 상태, 꺾인 팔로 통증이 오며 외마디 비명이 질러졌다.



"아악, 아파요 아파요!"



그럼에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프다고 아프다고 소리쳤지만 나를 끌고 가는 그들은 무표정한 사형집행인일 뿐이었다.



다행이다 싶어 안심하던 찰나 낚아채던 억센 손



그렇게 50여m를 끌려가다 닭장차에 들어가기 10m전. 간신히 간신히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소리쳤다.



"고등학생이에요! 고등학생이에요!"



그러나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우격다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등학생? 이런 데 오는 고등학생도 있어?"



그들은 들은 체 만 체 끌고 갈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끌려갈 수 는 없었다. 힐끔 쳐다보이는 닭장차 입구. 날 보고 어서 오란 듯 활짝 열린 문은 또 하나의 멋잇감을 기다리는 표정이었다. 소름이 돋았다. 버둥거리며 최후의 발악을 하듯 소리를 내 질렀다.



"정말 고등학생이에요! 학생증 보여드릴께요. 학생증 확인하면 되잖아요!"



학생증이란 말에 양팔에 가해지던 압력이 느슨해진다.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지만 양팔에 자유로움이 느껴지자 허겁지겁 학생증을 빼들었다. 닭장차 안에서는 "고개숙여 고개숙여"하며 퍽퍽 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움찔했다.



학생증을 확인한 그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표정으로 난감해하는 사이, 허리춤을 잡고 있던 팔도 서서히 힘을 빼는 듯 했다. "고등학생 맞잖아요!" 하면서 학생증을 낚아채듯 받아들었고 곧바로 줄행랑을 놓기 시작했다. 죽기 살기로 내달리며 눈에 보이는 골목길로 또다시 숨어들었다. 금방이라도 쫓아와 내 뒷덜미를 낚아챌 것 같았던 백골단은 다행히 나를 쫓아오지 않았다.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대기하던 순간, 내 옆에 있던 아저씨가 나를 쳐다보더니 한마디 던지신다.



"학생, 아까 끌려가던 학생이지?"



다시금 섬?한 마음이 들며 멀뚱멀뚱 쳐다보자, 내 표정을 눈치 챈 듯 안심시키려는 듯 다시 한마디 하신다.



"학생 조심해. 저 사람들 인정사정 안봐줘. 오늘 운 좋은줄 알아야 해."



학생증 받아들자 마자 죽기 살기 줄행랑


1987년 6월, 도심은 거센 시위의 물결이 파도치고 있었다. 연일 정부 고위 관계자의 '엄단한다'는 담화가 이어졌지만, 귀담아 들으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거리는 온통 경찰이 진을 치고 있었고, 포악함의 대명사 백골단의 위세는 대단했다. 백골단에게 잡히는 것은 그 자체가 죽음이라고 했다. 나 역시 간발의 차로 몇번이나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그들을 보면 언제나 긴장감이 감돌았다.


오로지 검거만을 전담하는 그들은 매우 폭력적이었다. '해산'이 목적이 아닌 '검거'가 목적인 그들에게 무리한 방식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도망가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에게 비열한 폭력이 공권력이란 이름으로 행해졌다.


그 정도 했으면 쫄기라도 하련만 그럴수록 민중들의 분노 또한 가라앉지 않았다. 거칠게 진압하는 경찰에 '폭력경찰, 살인경찰'이라는 칭호가 돌아갔다. 사람들은 더이상 그들을 '민중의 지팡이'라 부르지 않았다. '민중의 몽둥이 폭력(살인)경찰 물러가라!'. 그들을 향한 민심이었다.



87년 6월 항쟁 당시 남대문 시장의 상인들은 도망다니던 학생들을 곧잘 숨겨주었다. 그럴 때마다 먹잇감을 채기 위해 나선 백골단은 빈손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삼삼오오 모여있던 상인들이 수근거리며 욕 한마디씩 할라치면, 갑작스레 파편이 튀기며 매캐한 냄새가 가득했다. 사과탄이 날아든 것이다. 무고한 시민들에게 최루가스 고통을 안기며 화풀이를 하는 그들은 백골단이었다.



그 시절 명동성당에서 만난 어떤 시민은 그들을 '경찰로 위장한 불량배'라고도 했다. 돈을 주고 데려온 '조직폭력배'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누구도 그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의 진압은 경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거칠면서 잔인했기 때문이다. 오로지 시위대 검거가 목적인 그들에게 수단과 방법은 가릴 것이 없었다.


군사독재가 그리운 5공의 후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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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골단의 토끼몰이 진압으로 목숨을 잃은 성균관대의 김귀정씨.
ⓒ 김귀정추모사업회

정부에서 '공권력의 위상을 확립하겠다'고 떠들 때마다 백골단은 늘 그 앞에 있었다. 그 때마다 젊은 목숨들 또한 여럿이 쓰러져 나갔다. 91년 4월 명지대에서 시위중 백골단에 잡힌 강경대 학생은 백골단의 쇠파이프로 몰매를 맞고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91년 5월 충무로에서는 백골단의 토끼몰이식 진압에 성균관대 김귀정 학생이 숨을 거뒀다. 공권력의 확립을 위해 살인을 서슴지 않던 경찰. 그들이 백골단이었다.


80년 5월 광주를 탱크를 동원해 뭉개 버린 군사독재의 무리들에게 당시 백골단의 폭력은 큰 문제로 여길 사안이 아니었다. '국가 공권력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들에게 그까짓 폭력쯤이야 문제일 수 없었고, '검거'를 위해서라면 당연히 수반되야할 행동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위축되는 단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공권력의 권위'는 생각만큼 살아나지 못했다. 시위 현장에서는 정부의 엄포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서로간의 거친 모습만 남겨질 뿐이었다. 백골단의 거친 진압은 나중에 시위대에게 그대로 돌려 받았다. 혹여나 대오에서 낙오된 백골단이 걸려들면 시위대의 되갚음은 말그대로 '인정사정 볼 것 없이'였다.


언제 부터인지 모르지만 시위 현장에서 흰색 하이바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면서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최루탄도 먼 옛날 이야기가 된 요즘, 죽기 살기로 밤 새워 싸우던 모습도 90년대 초반까지 볼 수 있었던 모습으로 남을 뿐이다.

그런데, 17일 뉴스에서 다시금 들려오는 백골단 이야기. 왜 20년전 이야기가 '전설의 고향'이 되지 않고 지금 또다시 튀어 나오는 것인지 의아스러웠다.


백골단이 부활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지금이 5공 시절인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누가 현 정권을 군사독재의 후예들라고 안할까봐 그러는 것인지…. 세상이 거꾸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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